생명은 무엇으로 사는가

7부 · 닫으며

한 줌의 물음이 데려간 곳

처음으로 돌아가 본다. 교실의 화면 속, 순록 한 마리가 눈을 헤쳐 이끼 한 줌을 씹고 있었다. 그 손바닥만 한 한 줌으로 어떻게 저 큰 몸이 나오는가. 흘려보냈다면 그 자리에서 사라졌을 작은 물음 하나가, 스물여섯 편의 길이 되었다.

길은 이렇게 이어졌다. 순록은 더 많이 먹어 사는 것이 아니라, 적게 들인 것을 남김없이 쓰고 거의 버리지 않음으로써 살았다. 미생물에게 분해를 나누어 맡기고, 버릴 것을 되돌리고, 추위 앞에서는 쓰는 양 자체를 줄였다. 그 비움의 솜씨는 순록만의 것이 아니었다. 고래와 나무에서, 사람의 세포와 신경과 뇌에서, 똑같은 손길이 일하고 있었다. 옛 의서는 그것을 진인과 가벼운 몸이라 적었고, 본초는 몸을 기르는 약이라 했으며, 소옹은 ’쓰지 않는 하나가 전체를 살린다’는 한 원리로 꿰었다. 그리고 그 모든 물음은 결국, 그것을 묻고 있는 한 사람의 몸으로 돌아왔다.

하나의 문장이 남는다. 생명은 더 많이 들이는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잘 비우고 잘 채우는 그 박자로 산다. 정교함은 채움이 아니라 비움에서 온다. 한 줌의 물음이 데려간 곳은, 결국 이 한 줄이었다.


그러나 정직하게 마지막 한 가지를 인정해야 한다. 이 한 줄은 아직 ’완성된 답’이 아니라 ’잘 벼린 물음’이다.

이 연재가 모은 것은 거듭 어른거린 그림자였다. 자연에서도, 세포에서도, 옛 글에서도 같은 쪽을 가리키던 그림자. 그러나 그림자가 같은 쪽을 가리킨다고 해서, 그 뒤에 정말 하나의 실체가 서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닮음은 같음이 아니라던, 그 경계를 끝까지 놓지 않는다. 기(氣)가 정말 미토콘드리아인지, 체사용삼이 정말 생명의 법칙인지는, 여전히 증명되지 않은 채 비워 둔 자리로 남는다.

그래서 진짜 답은 글에 있지 않다. 몸에 있다. 적게 들이고 잘 비우는 그 박자가 정말 이 몸을 더 가볍고 맑게 하는지는, 읽어서가 아니라 살아 보아야 알 수 있다. 옛 의서가 말한 ’도에 이른다(至命)’는 것도, 결국 머리로 아는 일이 아니라 몸으로 도달하는 일이었다. 그러니 이 연재의 끝은 결론이 아니라 시작이다. 글에서 몸으로 건너가는 자리, 거기서부터가 진짜 탐구다.


한 가지 더 남겨 둘 말이 있다. 이 스물여섯 편은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다. 작은 물음 하나를 흘려보내지 않고, 인공지능의 손을 빌려 여러 갈래로 따라가고, 평생 읽은 옛 글과 맞대어 본 기록이다. 묻는 것은 사람이 하고, 자료를 나르는 것은 기계가 하고, 무엇을 믿을지 가리는 것은 다시 사람이 했다. 누구든, 흘려보내려던 자신의 작은 물음 하나를 이렇게 끝까지 따라가 볼 수 있다. 한 줌의 이끼가 그 큰 몸을 짓듯, 한 줌의 물음도 어딘가로 자란다.

그러니 이 글의 마지막은 마침표가 아니라, 독자에게 건네는 물음으로 둔다.

마지막 물음: 오늘 당신이 흘려보내려던 그 작은 물음은, 무엇이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