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은 무엇으로 사는가

6부 · 몸으로 묻다

觀物醫 — 모든 물음이 모이는 자리

호흡과 수련과 명상과 절식. 이 네 가지를 한 일과에 들여 보니, 그것들이 사실은 따로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렇다면 이 하나의 일을 무엇이라 부를까. 마침 손에 잡히는 이름이 있다. 사물을 그 자체로 보는 그 방법, 관물(觀物)에서 가져온 이름. 觀物醫라 부르기로 한다. 관물의 눈으로 사람을 보고, 그 몸을 기르는 길이라는 뜻이다.

거창한 새 학문이 아니다. 이 연재가 한 바퀴 돌며 만난 것들을, 사람의 몸이라는 한 자리에 모아 세운 그릇일 뿐이다. 그 그릇에는 네 기둥이 선다. 몸을 쓰는 일(수련), 옛 글을 읽는 일(경전), 마음을 비우는 일(명상), 그리고 잘 먹는 일(양생식). 이 네 기둥이 곧, 앞에서 본 비움의 세 층위—세포와 신경과 뇌—를 함께 다듬는 네 개의 손길이다.1


이 자리에서 비로소 흩어진 모든 물음이 한곳에 모인다.

순록에게 물어 얻은 자연의 이치—빈약한 입력이 정교한 변환을 부른다는 것—가 출발이었다. 세포에게 물어, 그 이치가 사람의 몸 안에서도 자가포식과 미토파지로 일하고 있음을 보았다. 옛 의서에게 물어, 그것이 진인과 가벼운 몸이라는 오랜 언어로 이미 적혀 있었음을 알았다. 본초에게 물어, 약조차 병을 고치기보다 몸을 기르는 자리에 있었음을 보았다. 소옹에게 물어, 그 모두가 ’비움이 작동의 조건’이라는 한 원리의 여러 얼굴임을, 그러나 닮음을 같음이라 우겨선 안 됨을 배웠다. 그리고 마침내 내 몸에게 물어, 그 이치를 직접 재 보기로 했다. 觀物醫는 그 모든 물음이 흘러들어 고이는 못이다.

다만 이 못에는 늘 비워 두는 자리가 있다. 체사용삼이 하나를 비워 두었듯, 觀物醫에도 측정으로 환원되지 않는 자리—말로 다 풀 수 없고 숫자로 다 담을 수 없는, 오래 몸으로 익혀야만 닿는 자리—를 비워 둔다. 그 빈자리가 있어, 나머지가 함부로 단정으로 굳지 않는다.


그리고 이 그릇은 한 가지를 정직하게 인정하며 선다. 觀物醫가 약속하는 것은 만병통치도, 불로장생도 아니다. 그런 것을 내세우는 순간, 그것은 앞에서 경계한 망령된 말이 된다. 觀物醫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자연과 옛 글과 과학이 거듭 가리킨 그 방향—적게 들이고, 잘 비우고 채우며, 자연의 박자에 몸을 포개는 길—이 사람을 더 가볍고 맑게 한다는 것뿐이다. 그 방향이 옳은지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몸이 오래 살아 내며 확인할 일로 남는다.

한 줌의 이끼에서 시작한 물음이, 여기까지 왔다. 순록 한 마리가, 사람의 몸을 보는 하나의 길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끝일까. 못에 물이 고였다고 해서, 강이 끝난 것은 아니다.

다음 물음: 이 모든 물음의 끝에서, 정작 가장 큰 물음 하나는 아직 답해지지 않은 것은 아닌가?


Footnotes

  1. 관물(以物觀物)의 방법을 의학·수련에 적용한 통합 틀로서의 觀物醫. 體(수련)·學(경전)·悟(명상)·藥(양생식)의 네 축이 세포·자율신경·뇌의 비움을 함께 다듬는다. 치료가 아니라 양생 가이드이며, 약은 전문가 협진의 영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