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은 무엇으로 사는가

5부 · 소옹에게 묻다

망령된 앎을 경계함

소옹은 세상을 수로 읽어 천 년 뒤를 내다본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흔히 신비한 예언가로 오해받는다. 그러나 그를 변호한 후대의 학자들은 한결같이 말했다. 그의 앎은 점술이 아니라 이치를 끝까지 밝힌 데서 나온 것이라고. 꽃이 피면 질 것을 아는 일은 점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다. 소옹은 그 이치를 극한까지 밀고 갔을 뿐, 없는 것을 지어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1

정작 소옹 자신은 누구보다 그 경계를 단단히 그어 두었다. 그는 망지(妄知)와 망언(妄言), 곧 망령된 앎과 망령된 말을 거듭 경계했다. 마음으로 알 수 있는 데까지만 알고, 입으로 말할 수 있는 데까지만 말하라. 그 너머를 억지로 알았다 우기고 말했다 하면, 그것은 이치가 아니라 헛것이라는 것이다. 비움의 원리로 세상을 읽되, 그 원리를 함부로 모든 것에 갖다 붙이는 것을 그는 스스로 금했다.


이 경계가, 이 연재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한 가닥이다.

지금까지 순록과 세포와 옛 의서와 약과 소옹이 모두 ’비움’이라는 한 자리를 가리킨다고 말해 왔다. 그 겹침은 분명 놀랍다. 그러나 놀라움에 취하는 순간, 위험이 시작된다. 닮았다는 것과 같다는 것은 다르다. 순록의 겨울 대사와 소옹의 체사용삼이 닮은 구조를 보인다 해서, 둘이 같은 하나의 법칙이라고 말하면 그것은 망지다. 동양의 기(氣)와 미토콘드리아가 닮았다 해서 같다고 우기면, 그것 역시 망언이다.

닮음은 생각을 자극하는 좋은 실마리다. 그러나 실마리는 증거가 아니다. 자연에서 본 이치를 사람에게로 옮길 때, 옛말과 현대 과학을 나란히 놓을 때, 그 사이에는 늘 ’아직 증명되지 않은 틈’이 있다. 그 틈을 정직하게 비워 두는 것. 메우고 싶은 욕심을 누르고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소옹이 말한 참된 앎의 조건이었다.


돌아보면, 앞 편에서 본 ’나를 비움’이 바로 이 경계의 뿌리였다. 순록에게서 보고 싶은 것을 보려는 마음, 옛 지혜가 현대 과학으로 증명되기를 바라는 마음. 그 바람(我)을 앞세우는 순간, 사람은 닮음을 같음이라 우기게 된다. 나를 비우는 태도가, 곧 망령된 앎을 막는 빗장이었던 것이다. 비움은 보는 법이자, 동시에 함부로 단정하지 않는 절제이기도 했다.

그러니 이 연재가 약속할 수 있는 것은 ’비움이 만물의 법칙’이라는 거창한 단정이 아니다. 다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자연에서도, 세포에서도, 옛 의서와 약에서도, 소옹의 셈에서도, 비움이 작동의 조건이라는 같은 그림자가 거듭 어른거렸다고. 그 그림자가 정말 하나의 실체인지는, 더 따져 보아야 할 일로 남겨 둔다.


이제 길은 한 곳으로 모인다. 자연과 세포와 옛 글을 거쳐 온 이 모든 물음이, 결국 한 자리에서 만나야 한다. 다름 아닌, 그것을 묻고 있는 이 사람의 몸이다.

다음 물음: 자연과 옛 글에서 본 이 비움의 이치가, 정작 내 몸 안에서는 어떻게 한꺼번에 만나는가?


Footnotes

  1. 주희와 후대 학자들은 소옹의 예지를 신비술이 아니라 ’이치를 밝힘(明理)’의 결과로 변호했다. 소옹 자신은 心得而知·口得而言의 한계와 妄知·妄言을 경계하여 진리의 경계를 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