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 소옹에게 묻다
나를 비워야 보인다
여기까지 비움은 줄곧 몸 바깥의 이야기였다. 순록의 대사, 세포의 발전소, 약과 음식. 그런데 소옹은 이 비움의 원리를 한 군데 더 밀고 들어갔다. 사물을 보는 사람의 마음, 바로 그 안쪽이다.
그는 거울과 물과 성인을 나란히 놓고 견주었다. 거울은 사물을 비춘다. 그러나 거울은 사람이 만든 것이라 어딘가 인위가 묻어 있다. 물은 거울보다 낫다. 흙탕이 가라앉아 잔잔해진 물은 만물을 있는 그대로 비춘다. 그러나 물도 바람이 불면 흔들려 일그러진다. 그가 으뜸으로 친 것은 성인의 마음이다. 성인의 마음은 물보다 더 맑고 더 고요하여, 사물의 겉모습만이 아니라 그 속까지 일그러짐 없이 비춘다는 것이다.1
비결은 무엇인가. 소옹은 한마디로 답한다. 나로써 사물을 보지 않는 것(不以我觀物). 내 생각, 내 잣대, 내 바람을 앞세우지 않는 것. 그렇게 나를 비울 때, 사물이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는 이것을 사물로써 사물을 본다, 이물관물(以物觀物)이라 불렀다.
거울과 물의 비유를 곱씹다 보면, 익숙한 그림이 겹친다. 흔들리는 물은 아무것도 제대로 비추지 못한다. 욕심과 잡념으로 출렁이는 마음도 그렇다. 무언가를 보려고 마음을 더 채우고 더 분주히 굴릴수록, 도리어 대상은 일그러진다. 잘 보려면 더 보태는 것이 아니라, 흔들림을 가라앉히고 비워야 한다. 보는 일에서도 정교함은 채움이 아니라 비움에서 나왔다.
수련에서 마음을 고요히 한다는 것이 막연하게 느껴졌던 까닭을, 이제 알겠다. 그것은 머리를 텅 비워 멍해지는 일이 아니다. 대상을 가리던 내 잣대와 기대를 내려놓아, 흙탕을 가라앉히는 일이다. 잔잔해진 물 위에 비로소 달이 또렷이 뜨듯, 가라앉은 마음 위에 사물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순록을 순록의 처지에서 보게 된 그 순간도, 실은 ’많이 먹어야 강하다’는 내 잣대를 내려놓은 순간이었다.
여기서 소옹의 진짜 깊이가 드러난다. 그는 두 가지 비움이 사실은 하나임을 보았다.
하나는 사물의 비움이다. 다 쓰지 않고 비워 둔 자리가 있어야 사물이 제대로 작동한다(體四用三). 다른 하나는 마음의 비움이다. 나를 비워야 사물이 제대로 보인다(以物觀物). 소옹은 이 둘을 따로 떼어 두지 않았다. 세상이 비움으로 작동하고, 마음도 비움으로 본다. 작동의 원리와 인식의 원리가 같은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다.2
이것이 이 연재 전체에서 가장 묘한 자리다. 비움을 탐구하는 길에서, 탐구하는 그 방법마저 비움이었다. 대상도 비움이고, 보는 눈도 비움이다. 순록의 몸이 비움으로 정교해졌듯, 순록을 보는 눈도 나를 비워야 정확해졌다. 형식과 내용이,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이 같은 이치로 포개진다.
그러나 비움을 이렇게 끝까지 밀어붙이면, 바로 거기서 새로운 위험이 고개를 든다. 모든 것이 비움으로 통한다는 깨달음은 자칫, 닮은 것을 같은 것이라 우기는 도취로 미끄러지기 쉽다. 순록의 비움과 세포의 비움과 마음의 비움이 ’같은 이치’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이 정말 같은지 아니면 그저 닮아 보일 뿐인지를 가려야 한다. 소옹은 이 미끄러짐을 누구보다 경계했다.
다음 물음: 비움의 이치로 모든 것을 꿰려 할 때, 무엇이 참된 앎과 헛된 우김을 가르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