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은 무엇으로 사는가

5부 · 소옹에게 묻다

변하지 않기에 변할 수 있다

소옹은 비움의 원리를 한 문장으로 못 박았다. 유불변시이능변(惟不變是以能變). 오직 변하지 않기 때문에, 변할 수 있다.

언뜻 말장난처럼 들린다. 변하지 않음과 변함은 정반대가 아닌가. 그러나 곱씹을수록 깊다. 모든 것이 한꺼번에 다 변해 버린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그 변화를 가늠하겠는가.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자리가 있어야, 나머지가 그 자리에 기대어 마음껏 변할 수 있다.

손에 잡히는 예로 옮겨 보면 분명해진다. 바퀴가 도는 것은 한가운데 굴대가 돌지 않고 박혀 있기 때문이다. 굴대까지 함께 돌면 바퀴는 굴러가지 못한다. 지렛대가 무거운 것을 들어 올리는 것은, 받침점이 꿈쩍 않고 버텨 주기 때문이다. 받침이 함께 움직이면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팽이가 빠르게 돌수록 그 중심은 오히려 고요히 멈춘 듯 서 있다. 변하지 않는 그 하나가, 바로 모든 변화의 받침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앞 편의 ’쓰지 않는 하나’를, 이번에는 시간의 언어로 옮긴 것이다. 쓰지 않고 비워 둔 그 자리가 나머지를 작동하게 하듯, 변하지 않고 남겨 둔 그 자리가 나머지를 변화하게 한다. 비움과 멈춤이 곧 작동과 변화의 뿌리라는 것. 가장 고요한 것이 가장 큰 움직임을 떠받친다는 것.


이 이치를 몸으로 가져와도 그대로 통한다. 아니, 몸에서야말로 더 또렷이 만져진다.

수련에서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던 말, 힘을 빼라. 이제 그 뜻이 환해진다. 온몸 구석구석에 힘을 다 주면 도리어 한 발짝도 제대로 내딛지 못한다. 굳은 몸은 둔하고 느리다. 어딘가는 비우고 풀어 두어야, 다른 곳이 자유로이 살아 움직인다. 검을 쥔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가면 칼끝이 무뎌지고, 손목을 비워 두어야 칼이 산다. 고수의 몸이 헐거워 보이는 것은 게을러서가 아니다. 쓰지 않을 자리를 정확히 비워, 쓸 자리가 마음껏 움직이도록 받쳐 두었기 때문이다. 비운 자리가 곧 받침이다.

세포도 그러했다. 늘 최대로만 돌리는 몸은 빨리 망가진다. 쉬는 동안 비워 두고 정비하는 몸이 더 오래, 더 잘 돈다. 다 쓰지 않음이 오래 쓰는 길이었다. 변하지 않는 받침을 남겨 두는 것이, 끝없는 변화를 오래 감당하는 길이었다. 쉼 없이 바쁜 것이 부지런함 같지만, 받침까지 갈아 쓰는 삶은 오래가지 못한다.


여기까지는 사물과 몸의 이치, 곧 ’있는 것’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데 소옹은 이 비움의 원리를 한 군데 더, 가장 안쪽으로 밀고 들어갔다. 바깥의 사물만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에까지. 무언가를 제대로 보려면, 보는 그 마음에서도 무언가를 비워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비움은 마침내, 보는 자의 눈 안으로 들어온다.

다음 물음: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 보려면, 보는 사람은 무엇을 비워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