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은 무엇으로 사는가

4부 · 본초에게 묻다

'무독'이라는 말의 함정

상품의 약은 “오래 먹어도 독이 없다”고 했다. 평생 두고 먹어도 탈이 없는 약이라니, 이보다 솔깃한 말이 없다. 그러나 바로 이 한마디 앞에서, 가장 차갑게 멈춰 서야 했다.

현대 독성학에는 오래된 원칙이 하나 있다. “독은 용량이 정한다.” 오백 년 전 한 의학자가 남긴 말인데, 지금도 이 분야의 첫 문장으로 인용된다. 세상에 조건 없이 무해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물도 한꺼번에 너무 많이 마시면 사람을 죽이고, 산소조차 지나치면 독이 된다. 무엇이든 양과 사람과 때에 따라 약도 되고 독도 된다. 그러니 ’절대적인 무독’이란, 엄밀히 말하면 성립하지 않는 말이다.

으뜸 약인 인삼조차 그렇다. 옛 책의 분류표에는 ’무독’으로 적혀 있지만, 실제로는 지나치게 먹으면 혈압이 오르고 잠을 설치며 가슴이 두근거린다. 어떤 약과 함께 쓰면 서로 부딪쳐 한쪽의 효력을 죽이거나 해를 키운다. 흥미롭게도 옛 약물 책 역시 이를 모르지 않았다. 함께 쓰면 안 되는 약의 짝을 따로 정해 경고해 두었다.1 그러니 옛사람의 ’무독’은 ’아무 때나 아무리 먹어도 좋다’는 뜻이 아니었다. ’제대로, 알맞게 쓰면 오래 두고 쓸 만하다’는 뜻에 가까웠다. 후대가 그 단서를 떼어 내고 ‘무독’ 두 글자만 떼어 읽은 것이 함정이었다.


함정은 옛말에만 있지 않다. 오늘의 시장에는 더 짙은 안개가 깔려 있다. ‘천연이라 안전하다’, ’자연에서 왔으니 몸에 좋다’는 말로 포장된 것들이 넘친다. 그러나 천연이 곧 안전은 아니다. 가장 강한 독의 상당수가 자연에서 온다. 버섯도, 복어도 천연이다. 검증되지 않은 효능을 내세운 건강식품에 규제 당국이 거듭 경고장을 보내는 것도 그 때문이다.

더 깊은 함정은 따로 있다. 그럴듯한 연구의 상당수가, 그 물건을 파는 쪽의 돈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효과가 있다는 결과만 골라 발표하고, 없다는 결과는 서랍에 넣어 두는 치우침. 좋은 숫자만 추려 보여 주는 그 기울어진 운동장을 늘 의심해야 한다.2 앞에서 소옹이 경계한 망령된 앎이, 약과 건강의 시장에서는 가장 큰돈이 걸린 형태로 되살아난다.


그러니 약 앞에서는 자연 앞에서보다 한층 더 차갑게 따져야 한다. 무엇이 얼마나 들었는지, 누구에게 맞는지, 어떤 근거로 좋다는 것인지. ’몸을 기른다’는 상품의 방향은 옳되, 그 이름표를 달고 팔리는 낱낱의 물건은 결코 균질하지 않다. 방향이 옳다는 것과, 눈앞의 이 한 병이 좋다는 것은 전혀 다른 말이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 둔다. 약을 짓고 처방하는 일은 면허를 가진 전문가의 몫이다. 이 글이 따라가는 것은 약장이 아니라 이치다. 무엇을 먹으라는 권유가 아니라, 옛사람이 약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읽는 일이다. 몸이 아프면 약은 의원에게 묻고, 여기서는 다만 ’기른다’는 그 생각의 결만 따라간다.


그렇게 한 발 물러서서 보면, 상품의 진짜 가르침은 어느 비싼 약초에 있지 않았다. 훨씬 소박하고 가까운 곳에 있었다. 옛사람은 약과 음식을 굳이 멀리 떼어 놓지 않았다. 오히려 둘의 뿌리가 같다고 보았다. 가장 으뜸가는 약이 실은 부엌에 있었다는 이야기다.

다음 물음: 약과 음식의 뿌리가 같다는 옛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Footnotes

  1. 인삼도 과량 시 고혈압·불면·심계 등(이른바 인삼남용증후군)과 약물 상호작용이 보고된다. 옛 본초서도 함께 쓰면 안 되는 배합(상반·십팔반)을 규정했다.

  2. 현대 독성학의 “독은 용량이 정한다”(파라켈수스) 원칙상 절대적 무독은 성립하지 않는다. 천연물·건강식품의 효능 주장에는 근거 부족과 상업적 후원에 따른 발표 편향(좋은 결과만 출판)을 주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