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 세포에게 묻다
같은 밥, 다른 에너지
순록은 위장 속 미생물의 도시 덕분에 이끼 한 줌을 거의 남김없이 몸으로 바꾸었다. 그렇다면 사람의 배 속에는 그런 도시가 없을까.
있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규모로. 사람의 큰창자에는 수십조 마리의 세균이 산다. 다 모으면 무게가 한두 근에 이른다고도 한다. 작은 짐승 한 마리만큼의 생명이 사람마다 제 몸 안에 들어 있는 셈이다. 이 세균들은 사람이 제 힘으로는 소화하지 못하는 것들—특히 거친 채소의 섬유질—을 대신 분해해 준다. 규모만 작을 뿐, 순록의 반추위가 하던 바로 그 일이다. 사람도 혼자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제 안에 세 든 미생물과 더불어 먹고 사는 것이다.
그래서 묘한 일이 벌어진다. 같은 밥을 먹어도 몸에 들어오는 에너지가 사람마다 다르다.
한 유명한 실험이 이를 또렷이 보여 주었다. 장 속에 미생물이 전혀 없도록 키운 쥐가 있다. 이 쥐에게 살찐 쥐의 장내 미생물을 옮겨 넣자, 같은 양을 먹였는데도 마른 쥐의 미생물을 받은 쥐보다 살이 더 붙었다.1 더 많이 먹어서가 아니다. 같은 밥에서 더 많이 뽑아냈기 때문이다. 똑같이 장을 봐 와도, 부엌의 살림꾼이 누구냐에 따라 차려지는 밥상이 달라지는 것과 같다. 내 몸의 살림 솜씨 가운데 적지 않은 몫이, 사실은 내가 아니라 내 안의 미생물의 것이었다.
미생물이 섬유질을 분해하며 내놓는 짧은사슬지방산이라는 물질은, 단순한 에너지원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장의 벽을 튼튼히 하고, 몸속 염증을 다스리며, 멀리 뇌의 기분에까지 신호를 보낸다.2 무엇을 먹느냐만이 아니라, 그것을 누가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몸과 마음을 함께 바꾸는 것이다.
여기서 순록의 그림이 한층 깊어진다. 정교한 변환은 혼자 하는 일이 아니었다. 순록도 사람도, 제 몸 안에 세균의 도시를 들이고 그들을 먹여 살리며, 그 대가로 빈약한 입력에서 더 많은 것을 얻는다. 적게 들여 알뜰히 쓰는 비결의 절반은, 내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세 든 무수한 생명의 것이었다.
그러니 잘 먹는다는 것은 나만 잘 먹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미생물을 잘 먹이는 일이기도 하다. 그들이 좋아하는 밥은 따로 있다. 거친 채소와 통곡식의 섬유질, 그리고 오래 익힌 발효 음식. 거친 음식이 몸에 좋다는 오랜 말, 김치와 된장 같은 발효식이 이롭다는 옛 지혜가, 알고 보면 이 도시의 살림과 맞닿아 있었다. 곱게 가공되어 미생물이 손댈 것 없이 곧바로 흡수되는 음식만 먹으면, 이 도시는 굶는다. 도시가 굶으면 그 주인도 결국 손해를 본다.
여기까지 보면 한 가지 짐작이 고개를 든다. 낡은 것을 잘 가려 버리고(미토파지), 들어온 것을 잘 처리하는(미생물) 몸이라면, 적게 먹고도 모자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적게 먹는 것이 단지 견딜 만한 정도가 아니라, 도리어 더 낫고 더 오래 사는 길일 수도 있지 않을까. 순록이 줄임으로 겨울을 났듯이.
그러나 이 대목에서는 발을 조심해 디뎌야 했다. 솔깃한 만큼, 함정도 깊었다. 비움은 약이되 비움만으로는 독에 가까워진다던 그 경고가, 여기서 다시 시험대에 오른다.
다음 물음: 적게 먹는 몸은 정말로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