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 세포에게 묻다
낡은 것을 버려야 새것이 산다
자연에게 물어 얻은 이치를, 이제 사람의 몸으로 가져온다. 나를 비운 눈으로 신중히. 그러자 순록의 살림이 세포 하나하나 안에서 더 작게, 그러나 더 또렷하게 되풀이되고 있었다.
사람의 몸을 움직이는 힘은 거의 다 미토콘드리아라는 작은 기관에서 나온다. 세포 하나에 수십에서 수천 개씩 들어 있는, 말하자면 세포 안의 발전소다. 우리가 들이쉰 산소와 먹은 음식이 이 발전소에서 만나, 몸이 쓰는 에너지로 바뀐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동안에도 몸속 수십조 개의 발전소가 쉼 없이 돌고 있다.
그런데 발전소도 쓰다 보면 낡는다. 낡은 발전소는 같은 연료를 넣어도 더 적은 힘을 내고, 그러면서 찌꺼기를 더 많이 흘린다. 그 찌꺼기가 몸을 안에서부터 녹슬게 하는 활성산소다. 오래된 화력발전소가 같은 석탄으로 전기는 적게 만들면서 매연만 더 뿜는 것과 같다. 그러니 낡은 발전소를 그대로 둔 도시는, 전력은 모자라고 공기는 탁해진다. 몸도 그렇다. 낡은 미토콘드리아를 방치하면 세포 전체가 둔해지고 더러워진다.1
몸의 해법은 순록과 똑같았다. 골라내어 버리는 것이다.
세포는 낡고 망가진 발전소를 용케 알아본다. 그리고 그것만 따로 표시해 분해하고 치운다. 멀쩡한 것은 그대로 두고, 못 쓰게 된 것만 가려서 없앤다. 이 선택적 청소를 미토파지, 곧 ’낡은 발전소 골라 버리기’라 부른다.2 앞에서 순록이 쓸 것과 버릴 것을 가렸듯, 세포도 둘 것과 치울 것을 가린다. 무턱대고 다 버리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낡은 것만 짚어 버리는 이 가림이야말로 솜씨다.
여기서 묘한 사실 하나가 드러난다. 쓰지 않고 가만히 있는 몸에서는 이 청소가 잘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발전소를 갈아 끼우는 신호는 몸을 쓸 때, 곧 어느 정도 부하가 걸릴 때 켜진다. 편하게만 지내면 낡은 발전소가 치워지지 않고 쌓인다. 가만히 있는 것이 몸을 아끼는 일 같지만, 실은 낡은 것을 쌓아 두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버리는 것만으로는 발전소가 늘지 않는다. 낡은 것을 치운 빈자리에 새 발전소를 지어 올려야, 비로소 세포의 힘이 좋아진다. 버림과 새로 지음이 짝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앞에서 본 비움–채움의 박자가, 세포 안에서는 발전소의 교체로 나타난다. 비우기만 해서는 안 된다던 그 말이, 여기서도 그대로 참이다.
이 교체를 가장 강하게 켜는 것이 운동이다. 몸을 힘껏 쓰면 낡은 발전소가 가려져 치워지고, 동시에 새 발전소를 지으라는 신호가 켜진다.3 운동이 몸에 좋은 까닭의 한 자락이 여기 있다. 운동은 단지 근육을 부풀리는 일이 아니라, 세포 속 발전소를 낡은 것에서 새것으로 갈아 끼우는 일이기도 하다. 단식 같은 가벼운 결핍도 같은 청소를 거든다. 헐고 다시 짓는 그 박자가, 몸의 가장 작은 단위에서 효율을 끌어올린다.
돌이켜보면 이것은 앞 편에서 본 ’힘을 빼라’는 말과도 통한다. 늘 최대로만 돌리는 발전소는 빨리 망가진다. 쓰고 비우고 정비하는 박자가 있어야 오래간다. 쉼 없이 켜 두는 것이 아니라, 적절히 끄고 갈아 끼우는 몸이 더 오래 더 잘 돈다.
여기까지는 ‘잘 버리고 잘 짓는’ 이야기다. 순록의 솜씨가 세포 안에서도 똑같이 돌아간다는 것. 그러나 순록에게는 한 가지가 더 있었다. 같은 이끼에서 남들보다 많은 것을 뽑아내던, 그 위장 속 미생물의 도시.
사람에게도 그런 것이 있을까. 같은 밥을 먹어도 더 알뜰히, 혹은 더 헤프게 처리하는, 내 몸 안의 또 다른 살림꾼이.
다음 물음: 같은 음식을 먹어도 누구는 더 많이, 누구는 더 적게 가져간다면, 그 차이는 어디서 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