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은 무엇으로 사는가

1부 · 자연에게 묻다

사물을 그 자체로 본다는 것

순록을 처음 보았을 때, 머릿속에는 이미 사람의 잣대가 있었다. 많이 먹어야 튼튼하고, 든든히 채워야 견딘다는 잣대. 그 잣대로 보면 이끼 한 줌으로 사는 순록은 그저 가엾고 신기한 짐승일 뿐이다. 먹을 것 없는 극지에서 용케 버티는 불쌍한 생명. 그렇게 보는 한, 비움이 어떻게 정교함을 낳는지는 끝내 보이지 않는다. 사람의 셈법을 짐승에게 씌우면, 짐승의 셈법은 가려지고 만다.

순록의 이치가 보이기 시작한 것은, 그 잣대를 내려놓고 나서였다. 순록을 사람의 기준이 아니라 순록의 처지에서, 곧 극지의 빈약한 먹이라는 그 조건 속에서 보았을 때, 비로소 줄임과 되돌림과 낮춤이 가엾은 결핍이 아니라 영리한 살림으로 보였다. 같은 순록인데, 잣대를 바꾸자 전혀 다른 존재가 나타난 것이다. 보는 눈을 바꾸지 않으면, 아무리 오래 들여다보아도 같은 것만 보인다.

옛사람이 이것을 정확히 짚어 두었다. 송나라의 학자 소옹은 이를 이물관물(以物觀物), 곧 ’사물로써 사물을 본다’고 했다. 그는 보는 일에 세 층이 있다고 보았다. 눈으로 보면 겉모습(形)만 보이고, 마음으로 보면 내 감정(情)이 끼어들며, 오직 이치(理)로 볼 때에야 사물의 참모습이 드러난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렇게 이치로 보려면 나(我)를 비워야 한다고 했다. 내 생각과 바람을 앞세우지 않을 때, 사물이 스스로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흙탕물이 가라앉아야 바닥이 비치듯.1


이상한 일이다. 비움을 탐구하는 이 길에서, 보는 방법마저 비움이었다.

순록의 몸이 비움으로 정교해졌듯, 순록을 보는 눈도 내 잣대를 비워야 정확해졌다. 대상도 비움이고, 보는 법도 비움이다. 같은 원리가 보이는 것과 보는 것, 그 양쪽에 함께 흐르고 있었다. 이것이 우연한 말장난이 아니라는 것은, 뒤에 소옹을 본격적으로 만나는 자리에서 더 분명해질 것이다.

그리고 이 비움에는 당장 요긴한 쓸모가 하나 있었다. 욕심을 막는 빗장이라는 쓸모다. 순록에게서 ’동양 양생의 위대한 진리’를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서면, 없는 것을 있다고 우기게 된다. 사물의 이치를 핑계 삼아 내 바람을 슬쩍 끼워 넣는 것이다. 나를 비우고 사물을 사물로 보는 태도는, 바로 그 투사를 막는다. 자연에서 본 이치를 사람에게 함부로 갖다 붙이지 않도록, 처음부터 고삐를 단단히 쥐여 준다. 닮은 것을 보고 같다고 외치고 싶은 그 유혹을, 보는 법 자체가 눌러 주는 셈이다. 이 빗장은 앞으로 이 연재가 위태로운 다리를 건널 때마다 거듭 손에 쥐게 될 것이다.


이제 자연에게 물어 얻은 것을 정리할 수 있다. 빈약한 입력이 정교한 변환을 부른다. 그 정교함은 분해의 분업, 자원의 되돌림, 그리고 규모의 줄임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순록 한 마리의 별난 사정이 아니라, 고래와 나무에까지 흐르는 생명의 이치로 보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려면, 내 잣대를 비운 눈이 필요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자연에서 본 이 이치를, 나를 비운 그 눈으로 신중히, 다음 자리로 옮겨 물어야 한다.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확인하기 어려운 자리. 다름 아닌, 사람의 몸이다. 자연의 이치가 정말 보편이라면, 그것은 내 몸속 가장 작은 곳에서도 일하고 있어야 한다.

다음 물음: 자연을 살린 이 비움의 이치가, 사람의 몸속 세포에서도 똑같이 작동하는가?


Footnotes

  1. 소옹(邵雍), 「관물내편」 12편. “관물(觀物)은 눈으로 봄(形)도, 마음으로 봄(情)도 아니요, 이치로 봄(理)이다.” 또한 反觀·無我 — “나로써 사물을 보지 않음이 곧 사물로써 사물을 봄(以物觀物)이다.”